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비아 드루실라 (문단 편집) === 장남과의 불화 === 그녀의 바람대로 장남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는데, 리비아는 티베리우스가 즉위한 후에도 아우구스투스 생전처럼 각종 권한을 행사했다. 이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어머니에게 반감이 커졌고 리비아는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보니 아들과 황실 안팎에서 매일같이 대립했다. 두 사람은 친모자 관계임에도 냉랭했으며, 황태후 리비아와 아들 티베리우스의 불화는 서기 26년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으로 떠난 이유 중 하나가 될 정도였다. 사실 티베리우스가 즉위하기 이전부터 리비아와 그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이전까지는 일반적인 모자 사이의 관계였지만 기원전 9년 대 드루수스가 요절하고 티베리우스의 첫번째 결혼생활이 리비아의 입김으로 파탄난 뒤 티베리우스가 기원전 6년 은퇴해버린 3여년 간의 일련의 사건으로 과거와 달리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오른팔인 [[아그리파]]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내 후계자로 진지하게 고려 중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대 드루수스의 요절로 인해 본인의 피를 잇는 후계자 설계가 계속 어그러지고 있었다. 특히, 이 무렵부터 게르마니아 전쟁, 갈리아 속주 재편의 공로를 인정받은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간접적인 추천 아래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집정관 취임한 이후 [[임페라토르]]에게만 허용된 개선식[* 약식 개선식으로 대 드루수스의 생애 첫 개선식이 로마에서 치뤄질 예정이었다고 하며, 이는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했던 티베리우스와 매우 다른 결정이었다고 한다.]을 앞두고 있었는데, 자신의 개선군단들과 네 번재 원정 성공 직후 전선 시찰 중 낙마해 그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기원전 9년 대 드루수스의 요절은 리비아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일단 아우구스투스는 결혼 당시부터 리비아 뱃속에 있었던 대 드루수스를 친아들로 생각했고 무척 아꼈던 것으로 유명했다.[* 이미 대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당대부터 있었을 정도였다.] 이미 아그리파 급사 직후부터 측근들과 원로원에게 자신의 외손자들이 있더라도 대 드루수스를 차기 황제로 낙점했음을 진지하게 실토할 정도였다. 아울러 그는 아내의 입김이 아닌 본인의 판단으로 친 아우구스투스파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기원전 9년도 집정관으로 입후보시키고 당선시킨 뒤, '대 드루수스 후계자 작업'에 공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옥타비아(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의 사위 대 드루수스가 리비아의 소망대로 곧 차기 황제가 되는 것에 주력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대 드루수스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 절규를 하며 신에게 저주를 퍼붓고 직접 말을 타고 국경까지 나가 며칠을 국경도시에서 대기했다. 이후 그는 울면서 관을 쓰다듬다가 겨우 양자의 관과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자격으로 대 드루수스 유해의 장례절차를 집행하고 직접 상주까지 맡았다. 또 장례식 날에는 직접 추도사를 낭독하면서 눈물을 쏟았고,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된 양자의 무덤에 시를 바치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대 드루수스를 그리워하는 시를 바쳤다. 이는 이 문서의 주인공인 리비아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의 경우 남편과 함께 죽을 때까지 아끼던 차남의 이른 죽음으로 [[심리치료]]와 [[상담]]까지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는 자신들의 상담역을 겸하는 스토아 학파 철학자 아리우스 디디무스의 조언에 따라 대 드루수스의 전신상과 흉상들을 황궁 집무실, 침실 등에 놓고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매일같이 이야기하면서 차남의 요절을 극복했다고 한다. 사실 리비아는 상술했듯 권력욕이 굉장했고, 자신의 핏줄이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가장 황제에 근접했던 차남의 요절 이후 굉장히 좌절했다. 그러나 리비아는 포기하지 않았고, 아그리파 사망 이후 남편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외동딸 [[율리아]] 재혼 문제에 개입해 이를 기회로 삼아 본인의 친아들 티베리우스를 정식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은밀히 부추겼다. 이때 리비아는 자신의 두 양자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에게는 유독 따뜻했던 남편에게 티베리우스의 이혼과 재혼이 정치적인 문제이며 후계자 문제와 관련된 공적인 문제라고 계속 설득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최고 통치자로서, 이미 행복하게 결혼 생활 중인 리비아의 장남 티베리우스에게 황제의 명령으로 강제로 이혼하라고 하면서 티베리우스와 본인의 외동딸인 율리아의 재혼을 명령했다. 이는 티베리우스를 아예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계부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아내 리비아의 가문(클라우디우스)과 자신의 가문(율리우스)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약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를 통해 자신의 피를 가진 후계자 후보를 늘리겠다는 계산도 담겨 있었기 때문에, 늘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절대 양보해줄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티베리우스에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내 빕사니아와 로마 상류층에선 굉장히 드물었던 연애결혼을 했고, 부하들에게 '[[베스타]] 여사제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혼전순결을 지켰고 [[애처가]]로 유명했다. 따라서 그에게 빕사니아와 이혼하는 건 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기 때문에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를 이 당시 유일하게 설득할 수 있는 어머니에게 강제적인 이혼과 재혼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로마의 최고 권력자인 아우구스투스의 명령과 태도는 강압적이고 절대적이었으며, 어머니 리비아는 애당초 새로운 후계설계의 흑막이라서 자신에게 눈물로 호소하는 아들에게 오히려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것을 종용했다. 따라서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일방적인 명령을 뒤집을 수 없었던 티베리우스는 아내와 친아들 소(小)드루수스를 지키기 위해 결국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강제이혼 후에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거리에서 우연히 전 아내 빕사니아를 만났는데, 빕사니아가 티베리우스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가자 티베리우스는 충격을 받아 빕사니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리비아의 바람과 달리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결혼생활은 율리아의 품행 문제, 리비아와 율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알력 다툼과 고부 갈등 등이 표출되면서 흔들리더니 이 결혼에서 태어난 티베릴루스가 요절하면서 완전히 끝장나게 되었다. 그리고 차기 황제로서 호민관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이 되자 모든 것에 질려버렸다는 듯이 다 던져버리고 자연인이 되어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버렸다. 그런데 이 당시 리비아는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가서 은퇴선언을 한 직후,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남편 아우구스투스를 설득해 티베리우스에게 황제 대리인 자격을 하사케했고, 이후 남편을 설득해 함께 티베리우스의 로마 복귀를 추진했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소 드루수스의 성년식 참석을 이유로 7년 뒤 복귀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모자 관계는 냉랭했다. 티베리우스의 입장에서 어머니 리비아는 본인의 친부를 결과적으로 버리고 아우구스투스를 택했고, 친부는 실의에 빠져 자신과 동생을 홀로 키우다가 자신이 9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난 걸 보았다. 또한 연애결혼으로 맺어졌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전처 빕사니아와 강제이혼을 하게 만든 것도 리비아였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 양자로 정식 입적되었지만 자신이 바라던 일이 전혀 아니었고 티베리우스를 불행하게 만들었기에 친모를 향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 후, 하지 말라고 요구했는데도 리비아는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누렸던 각종 특권으로 율리우스 가문의 중대사를 처리했고 정치에 간섭까지 했다. 이때문에 티베리우스는 계속된 어머니의 간섭을 더는 참지 않고 친모 리비아가 양아버지 생전에 누린 각종 특권을 박탈했다. 이때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수장 자격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을 통해 율리우스 가문에서 영향력을 보장받고 행사할 수 있게 된 어머니의 가문 내 특권까지 누리지 못하게 했다. 이후 리비아는 모든 정치적 권력을 상실했고 정치에서 철저하게 배제된다. 게다가 그녀의 [[소 드루수스|손자]]와 두 증손자가 [[세야누스]]의 음모로 희생되는 일을 겪었는데, 리비아는 [[게르마니쿠스]]의 막내 아들 [[칼리굴라|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를 음모에서 보호하고, 돌보며 함께 살았다고 한다.[* 티베리우스에게 각종 특권을 박탈당했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황후인 리비아의 영향력은 상당했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세야누스 일당조차 어린 칼리굴라를 제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